서촌에 재미있는 두 사람이 있다. 자신들을 스스로 '게으른' 또는 '귀찮아하는'으로 수식하지만 알고 보면 낮에는 건축가로, 저녁에는 '소소하우스(@soso.house.official)'의 주인장으로 살고 있는 '정&오' 부부이다. 최종 목표는 한량이라고 한다.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수많은 질문은 잠시 감추고, 반대로 무한히 들어보기로 했다. 서촌에서 또는 서촌이 아닌 곳에서 지내 온 5년여의 시간에 대해 정&오가 사이좋게 반반씩 나누어 이야기를 채워주었다.
리치몬드 파크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만날 수 있는 이들. 사실, 조금 무섭다.
오의 이야기 : 여행 속 일상살기
1년의 영국살이, 그리고 또 다시 1년간의 독일살이. 여행 속에서 일상을 즐긴다는 ‘한 달 살기’가 유행하던 2015년의 어느 날, 우리는 한 달보단 조금 긴 기간 동안 우리만의 특별한 일상을 찾으러 길을 떠났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곳에서 어떤, ‘남들은 갖지 못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에 휩싸여 있었다. 쉴 새 없이 어딘가를 가야 했고, 무엇인가를 보려했다. 마치, ‘서유럽 5개국 8박10일! 소중한 여름휴가, 허투루 보낼텐가!’ 를 외치는 투사같은 집념을 보였다고나 할까. 물론, 내 저질 체력에 한 달 뒤의 방전은 예정된 일이었고, Jung(40세, Oh의 짝꿍, ‘한량’이 꿈)에게 마음에 여유가 없다며 혼쭐이 났다.
한국에 돌아온 뒤 2년여의 타지 생활 중 지금도 종종 생각나는 것들은, 드넓은 리치몬드 공원 한가운데서 붉게 물든 석양 속 사슴무리를 만난 일이나, 조그마한 갤러리에서 안젤름 키퍼의 새 작품을 오롯이 혼자서만 감상할 수 있는 경험 같은, 어쩌면 한국에선 일어날 수 없을 색다른 경험 같은 것이 아니다.
영국인인 TONY만 빼고 모두가 통하던-우리들의 좌충우돌 영어. 그리고 언제나 그리운 그녀.
그것은, 뚝딱하고 음식을 만들어내는 태국 친구와의 식사시간이나, 잔디만 가득하던 공원에 원두막과 미니 풀장이 생겨 매일같이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거나, 또, 그 장소가 겨울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탈바꿈하는 바람에 이곳까지 지름신이 함께하시는구나를 깨달은 것 같은 소소하면서도, 어찌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모습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특별해진 이유는 새로운 장소가 평범한 일상에 설레임을 한 스푼 첨가했기 때문은 아닐까.
조용하던 광장은 겨울이되면, 마법처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마켓으로 변한다. / 꽤 오랜시간이 걸려도 종종 산책을 갔던 이유는, 이 한가로움을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정의 이야기 : 일상 속 여행하기
나에게는 짧은, 누군가에겐 조금은 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지 벌써 3년. 대학 시절부터 1, 2년마다 장소를 옮겨가며 살았던 내가, 어쩌다 보니 서촌이라는 낯선 장소에 가장 긴 시간 동안 머무르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한동안 지붕을 오가며 하늘을 즐기던 나의 시선을 빼앗아간 녀석. 요즘은 골목을 뛰어다닌다
주변에 하늘을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는 서촌의 작은 한옥에서 지내는 덕에 오롯이 우리만의 작은 하늘, 작은 마당을 선물 받았다. 애쓰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는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고 바람 소리를 즐긴다. 종종 작은 새들이 날아와 마당을 통통거리다 가곤 한다. 이 집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든다며 한가함을 한껏 즐긴다. 장소가 준 여유인 건지, Oh(영원히 20세, Jung의 친구, ‘꿈’이 너무 많음)는 나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는다. 아마도, 함께 한가함을 즐기는 게 아닐까.
산책이 시작되는 한가한 집 앞 골목길.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오늘은 어떤 골목을 여행해 볼까?
그렇게 선물받은 게으른 시간을 즐기고 있자면, 가끔 Oh는 산책을 가자며 날 일으킨다. 느즈막히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킬 켬 나선 산책길에, 낯선 골목을 만난다. 오늘은 가보지 않을 길을 가자며 여행을 온 듯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린 탓이다. 처음 보는 가게 앞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가볍게 맥주 한 잔 하자며 근처 단골 맥주집에 들러 주인분과 가벼운 수다를 즐긴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 그럼에도 조금은 특별한 일상이다.
한옥과 현대 건물이 뒤엉켜 있는 서촌. 그래서 골목길 산책이 특별하다 / 언젠가 높은 건물이 들어서 골목길에서 인왕산이 사라지는 풍경, 가끔은 슬픈 상상을 한다.
이런 사소한 여유를 즐기다 가끔 생각한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다시 바쁜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서울 한가운데서 하늘을 바라보며 일상의 사소함을 즐기는 나를 보며 실없이 웃는다. 마치 여행을 다니는 듯, 아직 그 짧은 여행이 끝나지 않은 듯 그렇게 일상 속의 여행을 즐기며 조금은 설레는 서촌을 살아간다.
서촌에 사는 건축가 부부. 부캐는 소소하우스 주인장이며 최종목표는 한량이다.
글 | 서촌유희 사진 | 서촌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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